태극기에대하여

태극기의 역사 태극기의 의미 태극기 게양방법
태극기의 게양시간 국기 게양일 국기에 대한 경례

문헌적인 연구

[태극]이란 무엇인가? [괘]란 무엇인가? 효()란 무엇인가?
삼태극은 천지인 태극도설(太極圖說)에 대하여 태극기의 표준색도

  1. 태극기의 역사
  2. 우리나라에서 국기문제가 처음으로 논의된것은 1875년의운요호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1881년 충청도 관찰사 이종원이 제출한 태극 팔괘의 도식에 의해 비로소 국기를 정하였으나 실제로 태극기를 국기로 사용한 것은 1882년 특명전권대신 겸 수신사인 박영효 일행이 일본으로 갔을 때 태극 도형과 4괘가그려진 태극기를 사용한 것이 처음이다.

    지금까지 박영효가 제작했던 것으로 알려진 태극기는 중국의 국기를 본받아 조선의 국기를만들 것을 이같은 사실은 97년 발견한 1882년 10월2일자 도쿄 일간신문시사신보에 실린 태극기 제작배경기사로 알게 된

    지난달 28일(1882년9월28일) 하나부사 공사와 함께 도쿄에 도착한 한 조선인의 이야기에 의하면으로 시작하는 이 기사는 "지금까지 조선에는 국기가 없었는데 이번에 청국에서 온 마건충이 조선의 국기는 청국을 모방해 삼각형 청색 바탕에 용을 그려 쓰도록 했다.

    본국은 황색을 사용하지만 조선은 동방에 해당하는 속방이요 청색을 존중한다는의미에서 청색바탕을 사용할 것을 지도했으나 국왕(고종)은 이를 크게 분개하여 결단코 청국 용기를 모방할수 없다고 거절하면서 사각형 옥색 바탕에 태극의 도를 적청색으로 그리고 기의 네 귀퉁이에 동서남북의 역괘를 붙여서 이제부터 조선의 국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라고 작성되어 있다.

    따라서 박영효는 1882년 수신사로 일본을 방문하러 가던중에 메이지마루호 선상에서 고종의 지시내용에 따라 극기를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1883년 1월 고종은 왕명으로 태극 도형과 4괘가 그려진 국기를 공식으로 제정, 반포하였으나 그 구체적인 제작, 사용 방법 등은 규정하지 않았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조금씩 다른 도안으로 사용되어 온 태극기 문양을 통일시키기 위해 당시 문교부가 기시정위원회를 설치하고 전문적인 검토와 함께 국민 각계의 의견을 수렴하여 1949년10월15일 국기 제작법을 제정,문교부 고시 제2호를 공포하였다.

    1984년 2월 21일 국기의 제작, 게양 방법 등 기본적인 사항을 정한 대한민국 국기에 관한 규정을 대통령령제 1361호로 제정 공포하였고, 1996년 12월 대한민국 국기에 관한 규정을 개정(대통령령 제15182호), 국기의 연중 24시간 게양 및 국기 문양의 생활 용품 활용 제도를 도입했다.

         


  3. 태극기의 의미
  4. 태극기는 평화, 통일, 창조, 영원을 뜻한다. 그리고 각 부분의 뜻은 다음과 같다.
    태극 의 우주의 생성원리를 뜻한다.
    적색은 존귀와 양을 뜻하고, 청색은 희망과 음을 뜻하며,
    이것이 태극에서 조화를 이루고 있다.
     
    가장자리의 4개의 막대 무늬는 괘라고 불리고 각각의 뜻은 다음과 같다.
    건)하늘,봄,동쪽, 인
    곤),땅,여름,서쪽,의
    이)이,해,가을,남쪽
    감)달,겨울,북쪽
    따라서 이들은 우주의 현상과 원리를 나타낸다.

         


  5. 태극기 게양방법
    1. 태극기만 달 경우
      1. 단독주택의 대문과 공동주택 각 세대의 난간 - 중앙에 국기를 게양하거나 앞에서 보아 왼쪽에 국기를 게양한다.
      2. 주택이 아닌 건물 -앞에서 보아 지상의 중앙이나 왼쪽, 옥상의 중앙,현관 차양시설 위 중앙 또는 주된 출입구 위 벽면의중앙에 국기를 게양한다.
      3. 건물안의 회의장·강당등에서 국기를 깃대에 달아서 세워 놓을 때에는 그 내부의 전면을 마주보아 그 전면의 중앙 또는 왼쪽에 국기가 위치하도록 한다.
      4. 각종 차량에는 전면을 밖에서 보아 왼쪽에 국기를 게양한다.
      5. 건물 또는 차량의 구조등으로 인하여 부득이한 경우에는 국기의게양위치를 변경할 수 있다.
      6. 국기와 다른기를 같이 게양할 때에는 게양하는 기의 수가 홀수인 경우에는 국기를 가장 윗자리인 중앙에 게양하여야하며 그 수가 짝수인 경우에는 국기를 가장윗자리인 마주보아 왼쪽의 첫번째에 게양하여야 한다.
       
    2. 외국기와 태극기를 함께 게양하는 경우
      1. 외국기는 우리나라를 승인한 나라에 한하여 게양하여야 한다. 다만, 국제적 회의 또는 체육대회등에 있어서는 우리나라를 승인하지 아니한 국가의 국기를 게양할 수 있으나 미리 총무처장관의 협의를 거쳐야 한다.
      2. 국기와 외국기는 가장 윗자리에 국기를 게양하고, 그 다음 위치부터 외국기를 게양하며 국기와 외국기는 그 크기 및 높이가 같도록 한다. 외국기의 게양 순위는 외국국가 명칭의 알파벳 순서에 따르고, 국기를 포함하여 게양하는 기가 짝수인 경우에는 국기를 마주보아 오른쪽으로 그 순서에 따라 외국기를 게양하며, 홀수인 경우에는 국기를 마주보아 국기를 중심으로 하여 가까운 왼쪽·오른쪽의 순으로 외국기를 게양한다.
      3. 국기와 외국기를 교차시켜 게양하여야 할 경우에는 밖에서 보아국기의 깃면이 왼쪽에 오도록 하고, 깃대는 외국기의 깃대 앞쪽에 오도록 한다.

         


  6. 태극기 게양시간
  7. 96년부터는 국민들이 국기를 가까이 하도록 하기 위해 국기를 24시간 게양할 수 있도록 하였다.
    야간에 게양할 경우 되도록 적절한 조명을 하여야 하며 심한 비, 바람등으로 훼손되거나 존엄성이 유지되기 어려운 경우가 아니면 계속 게 양할 수 있다. 학교 및 군부대의 주된 게양대는 국기를 낮에만 게양하며 낮에만 게양하는 경우 게양 및 강하시각은 다음과같다.
    야간행사등에 있어서 국기를 게양할 필요가 있는 경우, 국장 및 국민장등 조기를 게양하여야 하는 경우, 기타 특별한 사유로 인하여 중앙행정기관의 장이 총무처장관과 협의하여 정한 경우에는 국기의 게양 및 강하시각을 변경할 수 있다.

         


  8. 국기 게양하는 날
  9. 국기를 게양하여야 하는 날은 다음과 같고 다른 날에도 국기를 게양할 수 있다.

    1. 국경일
    2. 1월 1일
    3. 국군의 날
    4. 한글날
    5. 현충일(조기 게양)
    6. 국장기간(조기 게양)
    7. 국민장일(조기 게양)
    8. 정부가 따로 지정하는 날
    9. 지방자치단체가 조례 또는 지방의회의 의결로 정하는 경사스러운 날(당해 지방자치단체에 한한다)

         


  10. 국기에 대한 경례
    1. 제복을 입지 않은 사람 - 국기를 향하여 오른손을 펴서 왼편가슴에 대고 국기를 주목한다.
    2. 제복을 입지 않은 사람중 모자를 쓴 사람 - 국기를 향해 오른손으로 모자를 벗어 왼편가슴에 대고 국기를 주목한다.
      다만, 모자를벗기 곤란한 경우에는 이를 벗지 않을 수 있다.
    3. 제복을 입은 사람 - 국기를 향하여 거수경례를 한다.

         


  11. [태극]이란 무엇인가?
  12. (太極) - 두산동아 CD-ROM 백과에서

    중국 고대의 사상으로, 만물이 생성 전개되는 근원. 음양(陰陽)의 이기(二氣)가 태극의 일원
    (一元)에서 생성했다고 하는 사상은 《주역(周易)》의 <계사상(繫辭上)>에서 찾아볼 수 있
    다. 이 태극을 일원으로 보는 사상은 진한(秦漢) 때의 제서(諸書)에서 볼 수 있으며, 《여씨
    춘추(呂氏春秋)》의 <대악편(大樂篇)>에는 음악의 근원을 태일(太一)에 있다 하고, 이 태일
    에서 양의(兩儀)와 음양이 생성한다고  풀이하였다.  또한  《예기(禮記)》의 <예운편(禮運
    篇)>에는 예의 근원을 대일(大一)에 있다 하고, 이 대일에서 천지·음양·사시(四時)가 생성
    한다고 하였다. 순자(荀子)》의 <예론편(禮論篇)>에 나오는 것은 《예기》와 마찬가지여
    서, 중국 고대의 전통사상에서는 만물이 생성 전개하는 근원을 일원으로 보고, 이것을 태
    일·대일·태극 등으로 일컬었으며, 이 일원에서 이기·오행(五行)·만물이 화생(化生)한다
    고 설명하였다. 위에서 말한 것 가운데 태일사상이 가장 오래되었고, 태극사상은 후에 정리
    되어 역사상(易思想)에 도입되었다.

    태극太極 - 중앙멀티미디어 백과 사전에서

    우주 만물의 근원인 본체(本體). 하늘과 땅이 아직 나뉘기 전의 세상만물의 원시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역경(易經)》에서는 음· 양의 근원이자 통일체로 보았다. 태극에 대한
    사상은 송(宋)나라 때 대성하였는데, 송나라의 성리학자들은 태극을 우주의 최고법칙 ‘이(理)’와 연결시켰다. ‘이’는 기(氣)를 낳고, 기는 음· 양으로 전개되었다가 물질 세계의
    구성요소인 오행(五行)으로 바뀐다. 주돈이(;1017~73)는 이러한 개념을 그림(태극도)으로 나
    타내고 설명을 곁들여 체계화한 《태극도설(太極圖說)》을 펴냈다.

         


  13. [괘]란 무엇인가?
  14. 괘卦  - 중앙 멀티미디어 백과에서

      《주역》의 기본이 되는 64괘. 설괘전(說卦傳)에 의하면 괘는 천지인(天地人) 3재(三才)의 원리에 근거하여 양효(陽爻)와 음효(陰爻)가 여러 가지 모양으로 모여 나타내는 형상을 보고 점치는 데 사용한다. 괘를 구성하는 근원적 요소는 (--)으로 표현되는 음과, (ㅡ)으로 표현되는 양이다.

    괘 (卦) - 두산동아

    주역점(周易占)의 기본. 양효(陽爻)와 음효(陰爻)가 여러 가지 모양으로 모여서 나타내는 형상으로, 점치는 데 사용된다. 괘는 3효로 성립되는데, 양효는 ‘’모양으로 표시하여 ‘구(九)’로 이름 붙이고, 음효는 ‘--’로 표시하여 ‘육(六)’으로 이름 붙인다. 《사기(史記)》 <삼황기(三皇紀)>에 보면 복희(伏羲)가 비로소 8괘를 만들었다고 하고, 《경전석문(經典釋文)》 <서록(序錄)>에는 복희가 비로소 8괘를 만들고 이어 괘를 2개씩 겹쳐서 64괘를 만들었다고 한다. 8괘란, 건(乾)·태(兌)·이(離)·진(震)·손(巽)·감(坎)·간(艮)·곤(坤)의 여덟 괘로, 이처럼 3효로 된 것은 그대로 괘 또는 소성(小成)의 괘라고 하고, 8괘 중에서 어느 두 괘를 위 아래로 겹쳐 만든 괘를 중괘(重卦) 또는 대성(大成)의 괘라고 한다. 중괘는 위에 있는 것을 상괘(上卦) 또는 외괘(外卦)라고 하고, 밑에 있는 것을 하괘(下卦) 또는 내괘(內卦)라고 한다. 괘효(卦爻)는 반드시 밑에서부터 위로 그어 올라가야만 한다. 예를 들어서 이(離)가 상괘가 되고 감(坎)이 하괘가 되는 중괘 鍛  처음 그은 맨 밑의 획이 음(陰)의 표시이고, 음은 육(六)이 되어서 초륙(初六), 두 번째 획은 양(陽)의 표시이고, 양은 구(九)가 되어서 구이(九二), 세 번째 획은 음이 되어서 육삼(六三), 네 번째 획은 양이 되어서 구사(九四), 다섯 번째 획은 음이 되어서 육오(六五), 맨 위의 획은 양이 되어서 상구(上九)의 명칭을 얻게 된다.
    점을 칠 때에는 중괘의 6효를 가지고 길흉화복을 판단한다.
    《주역(周易)》에 보면, 괘마다 전체의 괘상(卦象), 상괘와 하괘의 관계 등을 종합하여 판단한 괘사(卦辭)와 효마다 그 위치를 보아서 판단한 효사(爻辭)가 있어서 누구도 점쳐서 믿는 괘의 풀이를 할 수 있다. 괘사를 단(彖), 효사를 상(象)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괘사는 주(周)나라의 문왕이 만들고, 효사는 문왕의 아들인 주공(周公)이 만든 것으로 전해진다. 주의할 것은 건괘(乾卦)와 곤괘(坤卦)에
    한하여 6효의 효사 이외에 ‘용구(用九)’와 ‘용륙(用六)’의 효사가 있는 것이다. 64괘의 괘상도(卦象圖)와 괘명 및 그 세응(世應)은 [표]와 같다.

    육십사괘(六十四卦) - 두산

    운명 판단의 원리(原理). 복희(伏羲)가 처음으로 8괘를 만들고, 그 뒷사람이 그 중 2괘씩을 겹쳐 중괘(重卦) 64개를 만들었다고 한다. 중괘가 이루어짐으로써 6효(爻)가 비로소 성립되었다. 《주역(周易)》 상경(上經)에 30괘, 하경(下經)에 34괘를 싣고, 괘마다 괘상(卦象)을 설명한 괘사(卦辭)와 효를 풀이한 효사(爻辭)가 있어서, 점을 쳐서 괘를 얻으면 누구나 다 일의 길흉화복을 판단하게 된다. 64괘를 만든 인물에 대해서는 신농(神農)을 말하는 이도 있고, 하(夏)의 우왕(禹王)을 말하는 이도 있고, 주(周)의 문왕(文王)을 말하는 이도 있어서 확실한 것을 알 수 없다.

         


  15. 효()란 무엇인가?
  16. 《주역》을 구성하는 기수획(奇數劃)의 ‘―’과 우수획(偶數劃)의 ‘--’로 이루어진 기초
    단위. ‘―’은 양(陽)· 강강(剛强)을, ‘--’은 음(陰)· 유약(柔弱)을 뜻하며, 효는 만물의
    형상을 본뜬 것을 말한다. 주역은 모두 384개의 효(64괘 ×6효)로 이루어져 있고, 효 3개가 겹쳐 소성괘를, 소성괘 2개가 겹쳐 대성괘를 이룬다. 양효와 음효는 각각 상징적으로 다른 물체를 표현
    하는데, 낮· 남자· 왕· 남편· 움직임은 양효, 밤· 여자· 신하· 아내· 고요함은 음효
    를 뜻하고 있다.

         


    삼태극은 천지인 (하늘 땅 사람)이다.
  17. (하늘·땅·사람)이다.

    하늘과 땅이 아직 나누어지기 전에 태극에서 음양(陰陽)이 생겼고, 음양의 조화에서 오행(五行)이 생겼다. 세계의 궁극적 근거가 되는 태극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는 동양철학의 핵심이 되는 문제이다.

    한국의 태극문양은 유사 이전의 암각화와 고인돌에도, 고구려 벽화 사신도와 액막이의 부적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때의 태극은 하늘이고 우주이며 해와 달(日月)이고, 음양의 화합을 통해 풍년과 다산을 염원한 표상이다. 중국에서 태극문양이 처음 보이기로는 주돈이의 '태극도설'에서부터인데, 그 연대는 송나라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 못한다.

    태극은 가위바위보 놀이와 마찬가지로 먼저와 나중이 없이 꼬리를 물고 계속되는 무한성을 나타낸다. 적·청·황색의 삼태극이 상징하는 하늘·땅·사람은 각각이면서 하나이고, 그 가치 또한 동등하다. 태극의 음(陰)과 양(陽)이 화합하여 완전한 원형을 이루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늘·땅·사람이 모여 우주가 된다. 그러므로 태극과 삼태극은 모두 우주를 상징한다.

    천지인 3재의 조화사상은 삼태극에서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괘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상층의 효는 하늘, 중층의 효는 사람, 하층의 효는 땅을 상징하면서 천지인 3효가 하나의 괘를 이루고 있다. 물론 효 역시 음과 양으로 괘 역시 음과 양으로 나누어진다.

         


    태극도설(太極圖說)에 대하여
  18. 태극도설(太極圖說)에 대하여
    중국 북송(北宋)의 유학자(儒學者) 주돈이(周敦)의 저서. 우주의 생성, 인륜의 근원을 논한 249글자의 짧은 글이지만, 그 뒤 남송(南宋)의 대유(大儒) 주자(朱子)가 그의 정치(精緻)한 해석을 통하여 자신의 철학을 서술하였으므로, 주자학(朱子學)의 성전(聖典)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것은 ‘태극도’의 설로서, 그 5위(五位)의 순서에 따라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음정양동(陰靜陽動)·오행(五行)· 건곤남녀(乾坤男女)·만물화생(萬物化生)의 전개를 나타낸다. 즉,무극(無極)의 진(眞)과 이기오행(二氣五行)의 정(精)과의 묘합(妙合)으로 건남곤녀를
    낳고, 만물이 화생하나 만물은 결국 하나의 음양으로, 그리고 음양은 하나의 태극으로 돌아간다. 인간은 음양 5행의 수(秀)를 얻은 만물 중에서 가장 영묘(靈妙)한 존재이다. 그리하여 성인(聖人)은 인의중정(仁義中正)을 정하여 정(靜)을 주로 하는 인륜의 규범을 세운 것이라고 한다. 위의 일원(一元), 무극이태극에 관하여 도가연원설(道家淵源說)을 취하는 학자는 무극에서 태극이 일어난다고 보는 기일원론(氣一元論)을 제창하지만, 주자는 주자자득설(周子自得說)을 취하여 무극이므로 태극일 수 있다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제창하여 이른바 송학(宋學)을 형성하는 근거로 삼고 있다. - 두산동아에서
     
    <위의 우리나라 최초의 우표 사진은 주염계의 태극 도설에 나타나는 태극 음양도를 가운데 담고 있다.>

    이황의 聖學十圖중에서 第一, 太極圖 풀이 <이상은 역, 삼성출판사>

    第一,  태극도

    <무극,태극>무극(無極)이면서 태극(太極)이다. 태극이 동(動)하여 양(陽)을 생하고 동(動)이 극(極)하면 정(靜)하나니, 정하여 음(陰)을 생한다.

    <음정양동>정이 극하면 다시 동한다. 한번 동하고 한 번 정함이 서로 그 뿌리가 되어 음으로 갈리고 양으로 갈리니 양의(兩儀)가 맞서게 된다.  

    <오행>양이 변하고 음이 합하여 수(水), 화(火), 목(木), 금(金), 토(土)를 생하니 오기(五氣)가 순차로 펴지어 사시(四時)가 돌아가게 된다. 또 오행은 하나의 음양(陰陽)이요. 음양은 하나의 태극(太極)이요, 태극은 본래 무극(無極)이다. 오행의 생함이 각각 그 성(性)을 하나씩 가지니, 무극의 진(眞)과 이오(二五)의 정(精)이 묘합(妙合)하여 응결(凝結)된다.

    <건곤남녀>건도(乾道)는 남(男)이 되고 곤도(坤道)는 여(女)가 되어 두기가 서로 감(感)하여 만물을 화생(化生)한다. 만물이 생하고 생하여 변화는 다함이 없다.

    <만물화생>오직 사람이 그 수(秀,빼어남)을 얻어 가장 영(靈)하다. 형(形)이 이미 생기니 신(神)이 지(知)를 발(發)하고 오성(五性)이 감하여 움직이니, 선과 악이 갈리면서 만사가 생겨난다. 성인은 이것을 정하되 중정(中正)과 인의(仁義)로써 하고 정을 주로하여 (무욕함으로 정(靜)한다.) 인극(人極)을 세운다.
    그러므로 성인(聖人)은 천지와 더불어 그 덕이 합하고, 일월(日月)과 더불어 그 명(明)이 합하고, 사시와 더불어 그 서(序)를 합하고, 귀신과 더불어 그 길흉이 합한다. 군자는 이것을 닦으므로 길하고, 소인은 이것을 어김으로 흉한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천(天)의 도를 세워 음과 양이라 하고, 지(地)의 도를 세워 유(柔,부드러움)와 강(剛,굳셈)이라 하고, 인(人)의 도를 세워 인(仁)과 의(義)라 한다.]고 하며, 또 말하기를 [시(始)에 원(原)하고 종(終)에 반(反)하면 사생(死生)의 설을 안다.]고 한 것이니, 위대하도다 《역(易)》이여! 이것이 그 지극(至極)이로다.

    [퇴계의 설명]

    (가장 위의 무극태극도) ○ 此 所謂無極而太極也. 卽陰陽而指其本體不雜乎陰陽而 爲言耳. - ○ 이것이 이른 바 무극이면서 태극이다. 음양에 즉하여 그 본체가 음양과 섞이지 아니함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둘째 음정양동도)⊙ 此○之動而陽 靜而陰也 中○者 基本體也. (오른쪽 하나의 양) 者 (왼쪽 둘의 양)之根也. (왼쪽 하나의 음) 者 (오른쪽 둘의 음)之根也 - ⊙ 이것은 ○이 동하여 양이 되고 정하여 음이 되는 것이다. 맨 속에 있는 ○은 그 본체요,  (우일양) 은 (좌이양)의 뿌리요. (좌일음)은 (우이음)의 뿌리이다.

    (가운데 오행도)此 陽變陰合而 生 水火木金土也 - 양이 변하고 음이 합하여 수화목금토를 생하는 것이다.

    (가운데 오행도 가장 아래의 ○)此無極二五所以妙合而 無間也. - 이것은 무극음양오행이 묘합하여 틈새없이 되는 소이이다.

    (넷째의 건곤남녀도의 ) ○乾男坤女以 氣化者言也 各一其性而 男女一太極也 - ○<건의 도가 남이 되고 곤의 도가 여가 된다>함은 氣化한 것으로써 말하는 것이니, 각각 그 성을 하나씩 가짐으로 남녀가 각각 하나의 태극을 가진다.

    (맨 아래의 만물화생도의) ○萬物化生以 形化者 言也 各一其性而 萬物一太極也 -○<만물이 화생한다>함은 형화(形化)한 것으로써 말하는 것이니 각각 하나의 태극을 가진다.

         


    태극기의 표준색도(97년 10월 지정)  
  19. 태극기의 표준색도(97년 10월 지정)

     

    96년 말 총무처에서 세계화. 개방화 시대에 국민의 단합과 국가의 정체성 확립 방안의 하나로 태극기 색의 표준화를 추진키로 하고 사계전문가 13명으로 '태극기 표준색도 협의회'를 구성한 후, 역사성. 감수성. 시각성. 실용성 등을 고려하여 4차에 걸친 회의 끝에 표준색도를 지정하였다.  
    그 과정에서 국민들이 어떤 태극기색을 좋아하는지를 알기 위해 97년 7월의 한국색채학회 세미나 장과 풍문여고, 탑골공원 및 경희대 등에서 학생, 시민 약 500명을 대상으로 태극기색의 선호도를 조사하여 국민의 색에 대한 감수성을 반영하였다.
    앞으로 태극기 색을 표현하실 때에는 아래에 나타난 색에 근접하도록 하여 주시기 바라며, 태극기 견본의 색은 자연광 아래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태극기의 표준색도


      - CIE 색좌표

      태극기빨강 : x = 0.5640, y = 0.3194, Y = 15.3
      태극기파랑 : x = 0.1556, y = 0.1354, Y = 6.5

      - Munsell 색표기
      태극기 빨강 : 6.0R 4.5/14
      태극기파랑 : 5.0PB 3.0/12

      ※ Pantone 가이드(1996-1997, 제9판)에서
      태극기 빨강은 186C를,
      태극기 파랑은 294C를 가장 가까운 색으로 추천함

      <영문>
      Standard color shades of Taegukki, the Korean National Flag are as follows: in the CIE System, the x, y, and Y coordinates for the red are x=0.5640, y=0.3194, Y=15.3; for the blue, x=0.1556, y=0.1354, Y=6.5.
      Alternatively, in the Munsell System of Color Notation, the corresponds to 6.0R 4.5/14, and the blue to 5.0PB 3.0/12.
      In the Pantone Matching System, 186C red and 294C blue are recommended. 

      * 위 표준색도는 백색아트지(120g)에 별색 잉크로 구현하여 한국 표준 과학연구원에서 표준광원 C로 측색한 수치를 기준으로 함.

       그간 정부에서는 2차례 국기색의 표준화를 시도한 적이 있으나 '82년 당시 주관부처인 문교부가 '국기색을 표준화하면 국민이 부담 없이 그릴 수 없다'는 이유로 이를 중단하였고, '91년에는 총무처가 추진하려 했으나 '표준화된 실제색의 광범위한 보급 없이 색기호 만으로는 국민의 인식도가 낮아 곤란하다' 는 이유 등으로 보류한바 있다.


     


 

태극기의 기원

생활속의 태극기

 

역사속의 태극문양

독립문 태극기


중국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을 헐어낸 자리에 자주민권과 자강 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서재필 박사 등이 주동되어 1898년에 세운 독립문은 프랑스의 개선문을 본받아 설계된 것으로 사적 제32호로 지정된 문화재이다.  아치 모양의 출입구 위쪽을 보면 전면은 한글로 '독립문'이라고 쓰여져 있고, 뒷면에는 한문으로 '獨立門'이라고 쓰여진 화강암 현판 좌우로 태극기가 조각되어 있다.

 

 만세문 태극문양

 만세문은 고종이 조선왕조에서 대한제국으로 나라 이름을 고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1920년에 세운 비각으로써 정식 명칭은 '고종즉위40년칭경기념비'이다. 바로 이 앞에 돌기둥을 세워 만든 만세문이 있다. 원래는 경복궁에 있었으나 일제에 의해 해체되고 그후 충무로의 어느 일본인 집의 대문으로 사용되다가 우여곡절 끝에 이곳에다 복원해 두었다. 이 만세문의 특징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면 두쪽의 철문 중앙에 주물로 뜬 32센티미터 크기의 태극문양이 장식되어 있다는 점이다. 태극문양은 청색과 홍색이 좌우로 대칭된 긴 몸통형이다.

 

원구단 태극문양

 

조선호텔 뒤뜰에 가면 원구단이 있다. 1897년 10월 11일 고종 황제의 왕위에 오르는 예식을 갖고 천신에 제사를 올리던 곳이다. 지금은 원구단은 없어지고 신위를 보셨던 3층 높이의 팔각형 황궁우(皇穹宇)만 남아있을 뿐이다. 이 황궁우를 오르는 여덟 방향의 돌계단을 보면 태극문양들이 새겨져 있다.


근정전 계단의 태극문양

[경복궁 근정전 돌계단의 태극문양중에 국내유일한 4태극문양]

 

창덕궁의 주합문 계단에 새겨진 3태극문양


 

덕수궁 중화전 계단의 태극문양

 

창경궁의 명정전의 태극문양

 

종묘 연녕전 태실 문설주에 새겨진 태극문양


 

종묘 정전의 대문 문설주에 새겨진 태극문양

 

종묘정전 계단에 새겨진 연꽃에 싸여진 태극문양

 

회암사지의 태극문양 1

 

회암사지의 태극문양 2

 

회암사지의 태극문양 3

 

회암사지의 태극문양 4

 

왕릉의 정자각 동쪽 계단 소맷돌

 

용주사 태극문양


-경기도 화성군 태안읍 송산리 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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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현장의 태극문양

 

 

ㅇ음양태극문양

 -원안에 2칸의 곡옥을

-원안에 2칸의 곡옥을 그려 음방은 청색으로 칠하고 양방은 홍색으로 칠한 문양
    -특히 우주 변화와 생성의 원리를 강조한 자연의 이치

ㅇ삼태극문양

    -원안에 3칸의 곡옥을 그려 홍색, 청색, 황색을 칠한 문양
    -특히 천(天), 지(地), 인(人)의 3재를 강조한 하늘의 이치   

   ㅇ태극살

옛 종묘 입구에 세워진 태극살문

 왕릉 정자각으로 이어지는 참도 입구에 세워진 태극살문.붉은 두 기둥의 꼭대기를 잇는나무살 중앙에 삼태극 문양의 태극살이 선명하게 보인다 

 옛 종묘 입구에 세워진 태극살문.종로 확장 계획에의해 헐렸으나  다시 복원하여 도시 미관을 과거와 조화있게 꾸민 것도 좋을 듯하다 

    -기둥 두 개를 세워 꼭대기에 살을 엮어 만든 문을 온통 빨강색으로 칠했다해서 홍살문이라고 하는데 특히 살 중앙에 음양태극문양이나 삼태극문양을 그려 놓은 것을 태극살이라함
-왕릉이나 왕이 지나간 길목에 태극살문을 세워 왕실과 왕의 권위를 상징했다. 현재의 종묘 입구에는 태극살문이 없으나 옛 종묘 입구에는 태극살문이 있었다.

1900년 초 종로길 도시 계획에 의해 헐어졌을 것이다. 태극살문은 아무데나 세우지 않았고 반드시 왕이 지나다닌 길목이나, 왕이 묵었던 곳에만 세웠다.  이러한 태극살문은 종묘 입구 외에도 원구단자리,용양봉저정(현 동작구 본동) 입구에도 세워졌을 것이다. 역사 유물은 영원히 사라진 것이 아니고 잠시 헐어지거나 훼손되었을뿐이므로 지금이라도 그 위치를 고증받아 옛 자리에 가장 가까운 곳에다 태극살문을 복원한다면 새로운 서울의 정취를 맛볼 수 있을 것 같다.
사진출처: 사진연구가 정성길(사진으로 본 한국의백년사)

 

 궁궐의 태극문양

   <좌로부터 경복궁 근정전 계단의 태극문양. 중앙은 경복궁 근정전 돌계단의 태극문양중에 국내유일한 4태극문양. 우측은 창덕궁의 주합문 계단에 새겨진 3태극문양>
 
 서울에 궁궐이 등장한 것은 1394년에 태조 이성계가 도읍지를 현재의 서울로 옮기고 경복궁을 지으면서부터였다. 그후 창덕궁(1405년), 창경궁(1418년), 덕수궁(1593년), 경희궁(1616년) 등 조선왕조 600여년 동안 서울에는 5곳에 궁궐이 지어졌다. 이 궁궐들의 정전(正殿)과 침전(寢殿)의 돌계단을 살펴보면 반드시 태극문양들이 새겨져 있고 예외적으로 몇 군데 건물들에서도 볼 수 있다.

경복궁
경복궁에는 근정전(정전)과 강령전(침전), 건춘문 계단에 태극문양들이 새겨져 있다. 특히 근정전의 서편 계단 중에는 4태극문양 하나가 새겨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강녕전은 정면 11칸,측면 5칸 규모로 초익공의 팔작 지붕이다. 왕의 침전이므로 용마루가 없다. 전면에 퇴가 개방된 중앙어칸은 마루로 좌우는 온돌방으로 꾸몄다. 강녕전 일곽은 1920년 창덕궁의 복원을 위해 헐려 없어진 것을 1995년에 복원하였다. 강녕전 전면과 후면으로 좌우에 같은 규모와 형태의 2개의 전과 2개의 당으로 구성되었다.

창경궁

창경궁에는 명정전(정전)과 홍화문 누각에 태극문양이 있다. 명정전의 태극문양은 다른 궁궐에서 볼 수 없는 위치에 새겨져 있다. 일반적으로 궁궐 정전의 태극문양은 동,서,북쪽의 계단에 새겨져 있으나, 창경궁의 명정전은 삼도와 연결되는 답도 계단에 새겨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창덕궁

창덕궁에는 인정전(정전)과 대조전(침전)과 주합루의 계단에 태극문양들이 새겨져 있으며, 특징으로는 하나같이 조선왕조의 국화였던 오앗꽃속에 태극문양들이 새겨져 있다는 점이다.창덕궁의 곤전은 대조전으로, 희정당의 바로 뒷편에 일곽을 구성하고 있다. 경복궁의 임금의 침전인 강녕전을 헐어다 희정당을 지을 때 왕비의 침전이던 교태전도 함께 옮겨다 대조전을 지었는데, 고스란히 옮긴 것이 아니라 창덕궁에 적합하도록 그 구조는 새롭게 하였다.  궁내의 다른 전각엔 용마루가 있으나 왕비의 처소에는 용마루가 없다. 따라서 궁의 어디에서나 용마루 없는 지붕이 중궁전임은 쉽게 알 수 있다.
  전각 중앙에 자그마한 월대가 설치되어 있는데, 이는 출입할 때 잠시 머물거나 하례 때 의식을 거행할 수 있도록 준비된 것이다. 월대의 정면과 좌우에 돌층계가 설치되어 있는데 여기에 태극문양이 새겨져 있다. 대조전은 성종·인조·효종·현종·철종·순종 등이 승하한 곳이기도 하다.

   <좌측은 중화전 계단의 태극문양, 우측은 창경궁의 명정전의 태극문양>

 

  덕수궁

덕수궁에는 중화전(정전)과 덕홍전 계단에 태극문양들이 새겨져 있다.
 덕홍전은 고종황제가 내외빈객들을 접견하던 건물이다. 1911년에 건립되어 현존 전각(殿閣) 중에 가장 나중에 건조된 전각(殿閣)의 하나이다. 기단은 장대석을 돌려쌓고 알맞은 기둥 높이에 간결한 익공(翼工)을 얹어 처마를 받게 하였다. 팔작지붕의 마루에는 양성(兩城)하고 귀마루에는 용두와 잡상(雜像)을 얹어 잡귀와 화재에 대비하고 있다. 현재는 건물 내부를 고종황제의 침전으로 복원하여 당시의 궁중 생활상을 볼 수 있도록 꾸며 놓았다.

경희궁은 해체 과정이 너무 처절하여 그 흔적을 찾기 어려우나 이곳 정전과 침전에도 태극문양들이 새겨져 있을 것이라는 짐작은 너무나도 뻔하다. 이렇듯 궁궐의 태극문양은 멀게는 600여년, 가깝게는 400여년이 전부터 조선왕조와 왕실의 상징처럼 새겨졌으나 이런 사실들이 어느 기록에도 나타나 있지 않고 있어 이 분야의 연구가 분발되어야 하리라 본다. 

안타까운 궁궐 경희궁

궁궐의 태극문양 답사 과정에서 매우 안타까운 사실이 있다면 경희궁의 사연이다. 경희궁은 광해군 8년(16161)에 세운 궁궐로써 한때 그 위엄이 당당하였으나 1910년 일본에 의해 궁궐 전체가 해체되면서 특히 정전인 숭정전을 현재의 동국대학교 위치로 이전시키므로써 역사의 흔적마저 말살해버렸다. 더군다나 애석한 일은 동국대학교안에 남아 있는 숭정전 건물이 정각원(正覺院)이란 이름으로 둔갑하여 궁궐의 위엄은 털끝만치도 찾아볼 수 없고 용상의 자리에 촛불 그릇만 가득 채워져 있는가 하며, 분명히 남아 있어야 할 월대(기단)의 4방향 계단과 그 계단 소맷돌에 새겨져 있어야 할 태극문양의 흔적조차도 깡그리 사라지고 없어 과연 이런 모습이 우리가 주장하는 문화재 사랑인지 착잡하기만 할 뿐이다. 숭정전은 본래의 모습으로 재현되어 경희궁 땅으로 옮겨져야 마땅할 것이다. 이제 궁궐을 찾는 관람객들은 건축물 화려함에만 도취하지 말고 궁궐에 새겨진 태극문양에 대하여 관심을 갖는 새로운 답사에 시야를 넓히기 바란다.

 종묘의 태극문양

중앙은 종묘 정전의 대문 문설주에 새겨진 태극문양,
우측은 정전 계단에 새겨진 연꽃에 싸여진 태극문양. 옛 종묘 입구에는 태극살문이 세워져 있었다>

종묘 영녕전 태실 문설주에 새겨진 태극문양

종묘 정전의 대문 문설주에 새겨진 태극문

정전 계단에 새겨진 연꽃에 싸여진 태극문양. 옛 종묘 입구에는 태극살문이 세워져 있었다>

 
옛 종묘 입구에 세워진 태극살문 1395년 태조 이성계에 의해 만들어진 종묘는 조선 왕조의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가 모셔져 있으며, 이곳에서 태극문양을 볼 수 있는 장소는 종묘정전과 영령전이다. 여기에 장식된 태극문양들의 특징은 각 문설주에 화려한 단청의 삼태극문양을 조각하여 신방목(信방木)으로 장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동안 여러 차례 보수등을 거치는 동안 원형이라고는 믿기 어려우나 건축기법의 전통을 헤아려 볼 때 정전과 영녕전에 장식된 여러 태극문양들은 적어도 600여년의 맥을 이어 온 것이라고 생각된다.
옛 종묘 입구에 사진에서 본 것 처럼 태극살문이 세워져 있었으나,종로 확장 계획에 의해 헐리고 지금은 없다. 종묘 입구에 태극살문이 세워져 있었다는 사실을 밝히게 된 것은 아마 처음이 아닐까 한다.(사진은 정성길 선생님 소장)
 그러면 정전의 태극문양부터 답사해보기로 한다.  종묘정전은 혼백이 다닌다는 남문, 제례 때 헌관이 출입하는 정문격인 동문, 악공과 참반원이 드나드는 서문의 울타리 안에 싸여 있다. 동문은 외부 기둥 4개와 삼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전을 찾는 관람객들은 이 동문을 무심코 넘어가기가 일쑤인데 잠깐만 문턱으로 시선을 돌리면 눈이 휘동그라질 것이다.  정전의 동문은 정문답게 위용이 당당하다. 여섯 층계의 계단 위에 다져진 기단 바깥쪽에는 우람한 기둥 네개가 세워져 있고, 안쪽으로는 길이 25센티미터의 사각기둥 네개 사이로 삼문이 깔끔한 자태로 서 있다. 이 문설주의 여섯 개 주춧돌 위에 지름 290㎝ 길이 25㎝ 크기로 조각된 삼태극심방목을 장식해 놓았다. 이 삼태극심방목들은 끌파기를 하였으나 매우 정교하고 날렵하여 빠른 회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적색, 청색, 녹색으로 단청을 하여 첫눈에 반할 정도로 화려하기만 하다. 동문의 문설주를 다 보았다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잠시 뒤로  미루고 담장 오른쪽을 돌아 남문을 살펴보기로 한다. 남문은 동문에 비해 다소 단조롭게 보인다. 이곳 문턱과 연결된 각 문설주에도 짙은 감색 칠을 한 삼태극심방목 여섯 개가 장식되어 있다. 이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서면 정전으로 오르는 삼단 다섯쪽 계단이 있는데 이곳 두 군데의 소맷돌에서 태극문양을 볼 수 있는데 풍화 정도가 심하여 선명하지가 않다. 그러나 이 태극문양의 풍화 정도를 유심히 살펴 볼 때 아마도 종묘를 창건할 때 새겨진 것이 아니었나 추측이 된다. 따라서 종묘의 태극문양을 고증해줄만한 원품으로 여겨진다. 묘정은 박석으로 잘 포장되어 있다. 이 묘정에서 역대 왕과 왕비들의 신위를 모신 태실로 오르기 위해서는 다섯 방향의 화강암 돌계단을 이용해야 한다. 동쪽과 서쪽의 돌계단은 아무런 꾸밈도 없는 삼층 돌계단인데 반해 가운데쪽의 세 방향 계단들은 소맷돌이 놓여진 여섯 층계 계단이다. 이중 중앙의 계단 소맷돌 양쪽에만 음양태극문양이 조각되어 있다. 이 소맷돌은 지름 30센티미터 크기의 북모양인데 우선 중앙에 음양태극을 새기고 그 주위를 정교한 꽃무늬가 에워싸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런 태극문양은 고려시대 때 지은 청평사지의 금당 소맷돌에 새겨진 태극문양 조각 기법과도 아주 비슷하다. 돌계단을 오르게 되면 바깥쪽으로 둘레 62㎝의 우람한 기둥들이     각 실의 문기둥과 마주한 채 일렬로 세워져 있다.  서쪽 1실부터 태조와 왕비, 태종과 왕비, 세종과 왕비, 세조와 왕비, 성종과 왕비, 중종과 왕비, 선조와 왕비, 인조와 왕비, 효종과 왕비, 현종과 왕비, 숙종과 왕비, 영조와 왕비, 정조와 왕비, 순조와 왕비, 문종과 왕비, 헌정과 왕비, 철종과 왕비, 고종과 왕비, 순종과 왕비 등 19실에 신위가 모셔진 태실이 있다. 각 태실은 109㎝ 크기의 두 문짝으로 굳게 닫혀져 있다. 지름 28센티미터 크기의 삼태극심방목이 각 실당 2개씩 19실에  똑같은 크기로 줄을 맞추어 각 기둥 주춧돌에 장식되어 있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 진기할 정도이다.  영녕전은 정전보다 26년 뒤인 1421년(세종 3년)에 성종의 신위를 모실 때 태실이 부족하여 정전의 별관으로 지은 건물이다. 전체적인 구조가 정전에 비해 거의 다를 바가 없다. 세 방향의 출입문 속에 영녕전이 싸여 있는 것도 그렇고 묘정의  꾸밈새나 태실로 올라가는 돌계단도 비슷하다. 영녕전의 정문인 남문은 정전의 남문에 비해 소박하다. 얕은 문터가 다져 있고 이곳을 오르는 세 방향의 디딤돌도 단조롭게 하나씩만 놓여져 있다. 이 남문에도 지름 39㎝ 길이 23㎝ 정도 크기의 삼태극심방목이 각 기둥 주춧돌 위에 장식되어 있다. 우선 3㎝ 너비의 원을 양각하고 그 안에 삼태극을 끌파기 했는데 몸통이 굵은 태극모양이다. 삼문으로 짜여진 동문에도 여섯 개의 삼태극심방목이 장식되어 있는데 크기는 남문에 비해 다소 작은 편이다. 이곳 태실은 총 16실이고 각 실마다 2개의 삼태극심방목이 머리 선을 맞추듯 일렬로 장식되어 있는 모습 또한 장관이다. 영녕전의 삼태극심방목은 남문에 여섯 개, 서문에 두 개, 태실의 각방을 구분 짓는 기둥에 서른 두 개가 장식되어 있다. (
연구과제 -영녕전에서 고개를 갸웃 뚱해야 할 것은 마당에서 태실로 오르는 세 돌계단이다. 정전의 별관으로 지어진 건물이라면 당연히 이곳 돌계단의 소맷돌에도 태극문양이 조각되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돌계단 역시 보수 과정에서 각 소맷돌마다 태극문양의 조각이 빠져 있어 그 품격이 경솔해 보여 향후 진지한 답사와 연구로 규명 보완해야 것이다.

 

동구릉

유래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 2-1번지에 자리잡고 있는 동구릉은 태조 이성계가 1408년(태종 8)사망하자 당시 영의정부사 하륜(河崙)이 능지로 정해진 곳이다.
 동구릉은 자그마치 57만 9,557평의 넓은 대지 위에 조선시대의 왕과 왕비 17위의 유택(幽宅)이 다듬어진 우리나라 최대의 왕릉군이다.
 이곳 왕릉군은 당초 동구릉이라 하지 않았으나 1855년(철종6)에 추존왕 익종의 능인 수릉(綏陵)이 아홉번째로 조성되고나서였으며 그 이전에는 동오릉(東五陵), 동칠릉(東七陵)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동구릉에는 태조 이성계의 능인 건원릉(健元陵)을 비롯하여 현릉(顯陵 : 5대 문종과 그의 비 현덕왕후), 목릉(穆陵 : 14대 선조와 그의 비 의인왕후, 계비 인목왕후), 휘릉(徽陵 : 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 숭릉(崇陵 : 18대 현종과 그의 비 명성왕후), 혜릉(惠陵 : 20대 경종의 비 단의왕후), 원릉(元陵 : 21대 영조와 그의 계비 정순왕후), 수릉(綏陵 : 23대 순조의 세자인 추존왕 익종과 그의 비 신정왕후), 경릉(景陵 : 24대 헌종과 그의 비 효현왕후, 계비 효정왕후) 등 모두 아홉 개의 능이 다듬어져 있으며 사적 제193호로 지정된 국가 문화재이다.

동구릉의 태극문양
 동구릉에는 태극살이 꽂혀진 태극살과, 음양태극문양 12면, 삼태극문양 24면을 볼 수 있어 마치 태극문양종합박물관을 방불케 한다. 먼저 각 왕릉 입구에는 왕의 권위와 신성함을 상징하는 태극살 홍살문들이 있다. 비록 홍살문 기둥과 각 살들은 노후될 때마다 새것으로 바꾸었으나 기둥 주춧돌의 연륜을 더듬어 볼 때 능이 조성될 때부터 현재와 같은 모습의 홍·청·황색의 태극살 홍살문을 만들어 놓았음을 짐작케 한다. 태극살문의 기둥들은 대부분 지름 60㎝ 크기의 팔각형 화강암 주춧돌 위에 세워져 있다. 왕릉을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태극살이 꽂혀진 홍살문을 통과해야 한다. 이 홍살문에서부터 시작된 참도(參道)를 따라가면 정자각 월대가 나오고, 참도는 다시 월대 우측으로 꺾어 정자각 출입구인 동편 계단까지 이어진다. 바로 정자각 마다 계단의 좌우측 소맷돌에 안과 밖으로 4면씩 태극문양들이 새겨져 있는데, 전체적으로 36면이 새겨져 있다.
 
태극문양이 있는 왕릉 배치도

동구릉의 상징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의 태극살문과 정자각과 무덤(1408)

건원릉의 정자각 소맷돌의 태극문양

 

1408년에 태조 이성계가 죽자 이곳에 왕릉을 마련하고 이름을 건원릉이라 지었다. 건원릉의 정자각 계단 소맷돌에는 지름 26센티미터 크기의 음양태극문양이 장식되어 있는데, 이 모양은 회암사지의 소맷돌 태극문양을 본떠서 만든 듯 하다.동구릉의 9채 정자각 계단중에서 음양태극문양이 장식되어 있는 곳   은 현릉과 유릉인데, 이 모양 역시 회암사지의 태극문양을 본떠서 만  들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 밖에 능의 정자각 돌계단 소맷돌에는 삼태극문양들이 장식되어 있다. 원릉과 휘릉의 정자각 계단 소맷돌 삼태극문양은 원 테두리 안에 새겨져 있어 눈길이 끈다 

서울의 왕릉과 태극문양

 서울에는 선정릉,태릉,정릉,태강릉,헌인릉 등 왕릉이 있으며 이곳에 가면 태극문양을 볼 수 있다.

 
선정릉(宣陵.靖陵)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가 묻혀 있는 선릉 정자각 돌계단에 조각된 태극문양. 태극문양 몸통에 참외줄 홈 파기를 해 놓았는데 선릉에서만 볼 수 있는 특징이다.
 중종의 정릉 정자각에는 태극문양이 조작되어 있지 않고 곱팽이 무늬만 조각되어 있다. 정자각중에 태극문양이 없는 유일한 곳이기도 하다

 

 지하철 2호선을 타고 선릉역에서 내리면 조선왕조 9대 왕인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의 선릉과 함께 중종의 정릉이 있다. 성종은 세조의 손자로 세조 3년(1457년)에 태어나 1469년 열세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재위 25년 동안 많은 업적을 남겼다. 경국대전을 완성하여 반포하고, 대전속록, 여지승람, 동국통감, 악학궤범 등을 완성시켜 세종 때에 이룩했던 조선 왕조 초기의 문물제도를 정비, 완성시킨 왕이다. 494년 38세로 승하하였으며, 계비 정현왕후는 우상 부원군 윤호의 딸로, 성종 11년에 비로 책봉되었다.

헌인릉 (獻陵·仁陵)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 산13-1호의 1,044,602㎡ 넓은 땅에 조선왕조 3대 왕인 태종< 太宗 >(1400∼1418, 재위)과 그 비< 妃 > 원경왕후< 元敬王后 > 민씨< 閔氏 >를 모신 헌릉< 獻陵 >과 제23대 순조< 純祖 >(1800∼1834, 재위)와 그 비 순원왕후< 純元王后 > 김씨< 金氏 >를 모신 인릉< 仁陵 >이 있다. 태조< 太祖 >의 다섯째아들로 탄생하였고 정종< 正宗 > 2년(1400)에 세자로 책봉되고 같은 해 정종의 양위< 讓位 >를 받아 즉위하였다. 재위 18년인 1418년에 세종< 世宗 >에게 선위< 禪位 >하고 세종 4년(1422)에 56세로 승하하였다. 원경왕후 민씨는 정종 2년 정빈< 貞嬪 >에 책봉되고, 정비< 靜妃 >에 진봉< 進封 >되었으며 56세로 승하하였다. 순조는 정조< 正祖 > 14년(1790)에 탄생하여 정조24년(1800)에 11세로 즉위하였고, 재위 34년(1834)에 45세로 승하하였다. 순원왕후는 정조 13년(1789)에 탄생하여 순조 2년(1802)에 비로 책봉되고, 철종< 哲宗 > 8년(1857)에 69세로 승하하였다.

 

 회암사터 태극문양

회암사는  '용의 눈물'로도 유명한 사찰로써 태조 이성계가 조선왕조를 개국하고 미처 종묘를 마련하지 못했을 때 왕실의 원찰로 사용하였던 곳이나 지금은 태극문양이 새겨진 여덟 단의 돌계단만이 역사의 풍화된 자국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절터의 돌계단마다 새겨진 태극문양의 사연이나 유래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었던 것을 필자에 의해 그 실마리가 조금씩 풀어지고 있다.

회암사터의 태극문양 설명 

회암사지는 음양태극문양의 박물관이다. 현재 남아 있는 8개 계단의 좌우측 소맷돌 18개에 안과 밖으로 36면의 음양 태극문양들이 각기 다른 형태로 새겨져 있을뿐만 아니라, 이것들은 조선왕조 시대 때에 그려진 음양태극문양의 기본 문양이었다. 회암사는 고려말경인 1328년에 창건된 후 1472년(성종3년)에 세조비인 정희왕후의 명에 따라 재정비하였으나 1565년 무렵부터 쇠퇴하기 시작하여 얼마지나지 않아서 폐사되고 말았다. 지금은 비록 8단의 축대만 남아 있으나 그 계단의 소맷돌을 살펴보면 눈이 휘동그라지고 만다. 남아 있는 계단의 소맷돌은 열여섯 개인데 각 소맷돌 좌우면에 조금씩 다른 모양의 음양태극 문양들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회암사지의 돌계단 소맷돌에 음양태극문양들이 장식된 시기는 고려말 나옹선사가 이곳을 동양 최대의 사찰로 번창시키기 위해 대대적인 공사를 벌려 건물만 해도 무려 262칸을 세워 동양 최대의 사찰로 발돋움했던 1370년 이후, 태조 이성계가  조선왕조를 개국하고 무학대사의 건의에 따라 왕실의 원찰(願刹)로 사용했을 무렵인 조선 개국 초기였을 것이다.  태조 이성계는 조선왕조의 이념을 성리학에 두고 왕정을 펼쳐 나갔는데 이때부터 태극문양은 민족의 문양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태극문양이 있는 사찰은 불과 몇 군데 밖에 없는데 그 연유를 더듬어보면 왕이 머물렀거나 왕실에 의해 번창시켰던 곳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태극문양은 '왕' 또는 '왕실'의 절대 권위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이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종묘나 칠궁, 왕릉(동구릉, 서오릉, 홍유릉, 서삼릉 등), 궁궐의 정전과 침전에도 태극문양을 새겨 놓았다. 회암사는 숭유억불 정책에도 불구하고 불교중흥에 힘을 쏟았던 중종의 계비 문정왕후가 1565(명종20년) 세상을 뜨면서부터 본격적으로 폐사의 수난을 당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현재의 회암사지에 남아 있는 현재의 음양태극문양들은 최하 430년이 넘고, 길게 거슬러 올라가면 600여년이 넘는 역사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아주 놀라운 사실은 1882년에 최초로 만든 태극기의 문양과 독립문 현판석의 태극기 문양들이 이곳 세 번째 축대의 계단 소맷돌과 두 번째 축대의 계단 소맷돌에서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설명은 곧 최초의 태극기 문양이 이곳 음양태극문양을 본떠서 만들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뒷받침해준다. 세 번째 축대 계단의 소맷돌은 지름 33㎝ 길이 29㎝ 크기로 먼저 3센티미터 너비의 테두리 원을 새긴 다음 머리 부분은 굵고 꼬리 부분이 짧은 음양태극문양이 각각 반원을 차지하다시피한 좌우대칭으로 새겨져 있다. 이런 모양은 1882년 10월 2일자 일본 발행 지지신보에서 소개한 최초의 태극기 그림과도 같다. 그런가하면 동구릉에 있는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 정자각(丁字閣) 동편 계단 소맷돌에 음양태극문양이 새겨져 있는데, 이것 역시 태조와 회암사와의 관계를 짚어 볼 때 결코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회암사의 음양태극문양들은 한마디로 「태극문화재」라고 말할만큼 태극문양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이자 도감으로써 가치가 클뿐만 아니라 「역사기념품」이나 「민족관광상품」으로 개발해도 좋을 것이다.

 

 회암사터와 각 계단에 남아있는 태극문양들 

윗줄 왼쪽 사진은 당간지주와 태극문양의 계단과 터만 남아있는 회암사터이다. 각 계단의  태극문양들은   모두 음양태극문양으로 회암사터에서만 볼수 있는데 음양의 방향을 다양하게 표현하여 조각한 것이   특징이다. 태조 이성계 왈릉의 정자각 소맷돌에 새겨진 태극문양을 유심히 살펴보면 이곳 태극문양과
  너무 비슷함을 느낄 수 있다

 

회암사와 무학대사와 태조 이성계
 무학은 1327년 경상도 합천에서 태어났다. 법명은 자초이며 18세에 수선사로 출가하였고 용문산의 혜명스님 에게서 불법을 전수받았다. 무학은 원에  유학하여 인도 출신의 고승 지공스님을 만나 선불교를 배웠고, 나옹 혜근스님을 만나 제자가 되었다. 나옹의 제자들은 무학을 배척했는데 이유는 천민 출신이라는 것 때문이었다. 그래서 무학은 공양왕의 왕사 책봉도 받아들이지 않고 나옹의 곁을 떠나 오랫동안 토굴에서 수도 생활에만 전념하다가 이성계를 만난 뒤로 그의 삶은 달라진다.
 무학은 새로운 왕국의 건설을 꿈꾸는 이성계의 충실한 인도자가 된다. 무학은 이성계를 보고 장차 임금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고, 꿈에 서까래 세 개를 지고 나왔다는 이성계의 말을 듣고 그것은 임금 왕자라고 하여 후에 왕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는 일화는 너무나도 유명하다. 무학은 천문지리와 음양도참설에 밝았을 뿐만 아니라 해몽술에 능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성계는 조선 개국 이후에 무학을 스승겸 왕사로 받들었다. 이성계와 함께 새 왕조를 개창하려는 세력들이 불교를 극구 배척하던 성리학자들이었음에도 무학이 정도전을 비롯한 성리학자들과 손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고려를 이끄는 불교가 국교로써 본분을 다하지 못하고 오히려 나라를 부패하게 만든 원인이었음을 개탄한 나머지 불교적인 입장보다는 개혁에 대한 염원이 더욱 간절했기 때문이었다. 무학은 태조의 왕사로 있으면서, 조선의 안정을 위해 새로운 왕도를 정하는 일과 왕궁을 건축하는 일에 가담하는 등 노년의 거의 전부를 조선의 건설에 쏟다가 1405년 79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사찰의 태극문양

경기도와 강원도의 몇몇 사찰에 가면 특히 대웅전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태극문양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그 대표적인 사찰이 옛 회암사이고 다음으로는 강원도 청평사터, 경기도 화성의 용주사 등인데, 이들 사찰에 태극문양이 새겨져 있는 이유로는 조선왕조시대에 특별히 왕이나 왕비가 돈을 들여 불사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청평사터의 돌계단 태극문양


 
옛청평사의 대웅전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소맷돌에 연꽃잎 속에 쌓인 음양태극이 돋보임

경기도와 강원도의 몇몇 사찰에 가면 특히 대웅전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태극문양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그 대표적인 사찰이 옛 회암사이고 다음으로는 강원도 청평사터, 경기도 화성의 용주사 등인데, 이들 사찰에 태극문양이 새겨져 있는 이유로는 조선왕조시대에 특별히 왕이나 왕비가 돈을 들여 불사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청평사터의 돌계단 태극문양


 
옛청평사의 대웅전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소맷돌에 연꽃잎 속에 쌓인 음양태극이 돋보임
동네의 평지에 용주사가 나타난다. 이곳 용주사의 특징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중에 하나가 삼문각의 대문 태극살과 대웅보전 계단의 태극문양이다.모든 절들은 일주문을 들어서면 천왕문을 배치해 놓았는데 용주사 만큼은 삼문각을 세워 놓고 대문의 윗 공간을 태극살로 막아 두었는데, 다른 절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형태이다. 이는 조선임금 정조가 할아버지 영조에 의해 아버지 사도세가 뒤주속에 갇혀 죽게되자 아버지 넋을 달래기 위해 옛 절터에다 1790년경에 용주사를 새로 지으면서 제사를 올리는 등 왕궁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삼문각 대문을 열고 천보루를 지나면 우리나라 탱화중에 전무후무하게 서양화의 음영법을 도입하여 그린 단원 김홍도의 후불탱화가 있는 대웅보전이 보이는데 이곳을 오르는 정면 계단의 어깨돌을 살펴보면 태극문양을 볼 수 있다. 바닥길이 137㎝, 높이 99㎝, 두께 40㎝ 크기의 화강암 어깨돌 머리부분에 바깥쪽은 모란문양이 새겨져 있으나 안쪽은 삼태극문양이 새겨져 있다. 사찰의 대표적인 장식문양은 연꽃문양이거나 당초문양이다. 그러나 왕이나 왕비가 머물렀다든지 직접 큰 시주를 내려 그 사찰을 번창시켰다면 분명히 대웅전 계단의 어깨돌에 분명히 태극문양을 두었는데 바로 궁궐의 별궁으로 취급하였기 때문이다.용주사 절 건물이 완공되던 날 밤 정조는 용이 여의주를 물고 하늘로 날아가는 꿈을 꾸고서 절 이름을 용주사라고 지었다는 설화가 있으며 사람들의 귀에는 효심사찰로 널리 전해져 오고 있다.

 

 

우표속의 태극기

 

해방기념 태극기우표 1946.5. 1 

 

 

1910년 일본은 우리나라의 허약해진 틈을 타 한반도를 강제로 빼앗갔다. 참으로 부끄러운 역사의 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수많은 독립애국지사의 생명을 잃은 끝에 1945년 8월 15일 자그마치 36년간의 일본통치를 끝내고 해방을 맞이했다.
 이런 뜻깊은 해방을 기념하기 위해 1946년 5월 1일 해방기념 태극기 우표를 발행했다.그러나 행방을 맞이한 한반도는 또 하나의 불행을 겪어야했다. 세계 열강과 정치 이념 때문에 한반도는 자유민주정권을 주장하는 남한과 공산당정권을 주장하는 북한으로 나누어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제1회총선기념 태극기우표 1948. 5. 10 

 

 

 

전쟁중 태극기우표 1950. 11. 20

 

유앤참전기념 태극기복우표 1951.

 

 1950년 6월 25일 새벽,북한의 공산당 정권이 남한을 침략하자 유엔연합국에서는 즉각 이사회를 열고 미국, 영국, 프랑스등 16개 나라에서 남한에 군대를 보내 북한공산당의 도발 행위를 단호히 응징토록하였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1951년 9월 15일 전쟁중에 유엔참전기념 태극기 우표를 발행하여 다시는 이땅에 전쟁이 없는 세계평화를 기원하였다.

 

올림픽 태극기우표 1988.

 

 이국에서 발행한 엽서들

  프랑스발행 엽서    
이 엽서는 1885년에서 1894년 무렵에 프랑스에서 발행한 것으로 우리나라보다 먼저 발행한 최초의 태극기엽서이다(인천 송도화랑 최웅규씨 소장). 엽서 윗 부분 오른쪽에 4괘를 포함한 태극기를 그려 놓았고, 그 대각선으로 왼쪽 귀퉁이에는 1884년에 우정국이 세워지면서 발행했던 초기 우표 5문짜리가 그려져 있다. 우정국의 우편 배달부가 지게에다 우편을 지고 양반댁으로 편지를 배달하면서 넙적 엎드려 인사 먼저 올리는 장면이다.4괘의 위치가 다르게 그려진 것은 당시 태극기 그림을 제대로 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지금처럼 법으로 정해진 규격된 국기를 만들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왼쪽 밑의 우표는 1884.11.18 일본대장성인쇄국에서 인쇄한 최초의 우표로 가격은 당시 화폐 단위로 5문짜리인데, 바로 이 우표 때문에 프랑스 발행 엽서 연대를 1885년에서 1894년으로 추정하게 된 것이다.


이탈리아발행엽서
이탈리아에서 발행한 엽서로 궁궐을 지키는 병사의 옷차림으로 보아 시대는 1900년 초반으로 추정된다. 궁궐 배경과 함께 아랫 부분 왼쪽에 긴 몸통 태극문양이 도안되어 있고 오른쪽에는 이탈리아 제품 화장품 을 넣어 광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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